마을은 끝내 가라앉았다_4대강 공사와 영주댐

들녘이 잠겼다. 흐르던 물은 댐을 밀어내지 못하고 차올랐다. 강아지 메리도 자전거 타는 노인도 이제 없다. 새벽 일 나가는 촌부도 등교하는 아이들도 보이지 않는다. 이제 흰 눈이 와도 그 마을엔 가 닿지 않을 것이다. 바람이 불어도 거기 무엇하나 흔들지 못할 것이다. 마을은 그 숱한 추억을 묻고 끝내 가라앉았다.
4대강 사업이 시작되던 해 전격적으로 발표된 댐 건설은 4개월 만에 착공에 들어갔다. 반대는 소용없었다. 댐은 오래된 마을과 유적을 수몰시키고 수많은 사람들의 삶터를 빼앗았다. 댐의 목적은 보 건설로 나빠지는 낙동강 수질을 개선하는 것이었다. 보를 만들지 않았다면 필요하지 않았을 댐으로 인해 500여 가구가 이주했고 내성천의 금모래가 골재로 팔려나갔다. 2016년 댐은 공사 6년 만에 완전한 모습을 드러냈다. 권력이 바뀌고 사업은 비리의 오명을 쓰고 실패작으로 낙인찍혔지만 돌이킬 수 있는 것은 없었다.
파국은 멀리서 온다. 사정없이 몰아치는 그 차가운 힘은 멀리서 와서 오래된 것들을 쓸어버린다. 권력의 심급에서 드러난 욕망이 변질되고 뒤틀려 강과 산 위에 떨어진다. 

영주댐은...
낙동강 상류인 내성천을 막아 만든 댐으로, 경북 영주시 평은면에 위치해 있다. 4대강 사업의 역점 공사로 2010년 착공해 2016년 10월 25일 공식적으로 준공됐다. 댐의 주 목적은 수질 유지. 낙동강의 보 설치로 악화되는 수질을 개선하기 위해 막대한 양의 담수를 가두는 것이다. 강을 막지 않았다면 지을 필요가 없는 댐이라는 점에서 논란이 컸다.
2015년 전시 <두 마을 이야기>의 작업 노트​​​​​​​

두 마을 이야기 
산과 강으로 둘러싸인 두 마을이 있다. 아름답다는 말로만은 표현하기 어려운 그야말로 원초적인 공간이다. 이곳에서 삶을 흔드는 그 무엇에 대해 생각하는 일은 반갑지 않았다. 
마을 사람들은 제 삶터를 위협받고 있었다. 산에는 거대한 철탑이 들어섰고, 강가의 집들은 댐 건설로 하나 둘 허물어져 갔다. 사람들이 막아섰지만 무엇 하나 막을 수 없었다. 
산 마을에서 고령의 주민들이 국책사업에 반기를 들고 위험한 행동을 감행한 것은 건강과 재산을 지키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는 아니었다. 국가는 공사를 진행하면서 주민들을 철저히 배제했고, ‘시골 늙은이’라는 말로 스스로를 규정한 노인들은 그 말이 똑같은 국민의 이름임을 확 인하기 위해 싸웠다. 스스로의 존재를 증명하기 위한 싸움이었다. 그들은 도시로 가는 송전선이 왜 머리 위로 지나야 하는지 물었고, 그것을 반대하는 것이 왜 안 되는지를 물었다. 
강 마을의 상실감은 이루 다 알기 어렵다. 단지 슬픔, 허망함 같은 말로는 담아낼 수 없는것이었다. 지금까지의 존재를 철저히 부정당하는 것과 같았다. 국가는 댐을 지으려 했고 500 가구가 넘는 주민들이 삶터를 떠나야 했다. 아름답던 내성천 금모래가 중장비로 퍼 올려져 팔려나갔다. 완공된 댐의 그늘에 남아 있는 주민들은 하루하루 떠날 날을 기다린다. 댐의 필요성에 대해서는 아직까지도 의견이 분분하지만 당시 주민들의 반대는 가볍게 무시되었다. 이주는 선택의 문제가 아니었다. 그렇게 “내 고향 죽어서야 떠나겠다”고 쓴 현수막은 사라진 지 오래다. 
산마을의 산 위에 집이 지어졌다. 강 마을의 산 위에도 집이 지어졌다. 얼기설기 만든 움막과 서양풍으로 화려하게 지은 이주단지의 새 집이다. 산마을 사물어지는 풍경을 견뎌야 했고, 물이 들어차면 새 집에서 마을을 내려다보는 일을 감당해야 한다. 본래의 삶터를 지키기 위해 지은 집과 본래의 삶터를 떠나기 위해 지은 집은 전혀 달라 보이지만 똑같이 어딘가 어색하다. 
산꼭대기 움막의 마을 사람들이 처절하게 진압 당하던 날 일군의 여경들이 단체사진을 찍는 것을 보았다. 진압 과정에서 쓰러진 주민들이 소방헬기에 응급 후송될 때였다. 부상자 와 불과 몇 걸음 거리에서 여경들이 앳된 목소리로 다같이 ‘스마일’을 외쳤다. 해맑았다. 뭔가 부적절해 보이는 상황이었지만 어떤 악의도 느껴지지는 않았다. 그 때 생각했다. 그들 은 완전히 다른 세계에 살고 있었다. 한 사회 안에서의 어떤 고통을 완전히 객체화해버리는 것에 우리는 익숙해진 것일까. 부조리한 상황이 누군가의 평범한 일상 속에서 아무렇지 않게 발현되는 풍경에서 거대한 벽이 만져졌다. 
두 마을에서 우리 시대의 얼굴을 본다. 국가는 밥 한 공기, 풀 한포기 위에 군림했다. ‘권위주의’라는 수식어를 아직 떼지 못한 채 늘 정답을 내리려 애썼고, 오답자를 낙인찍으면서 그 존재를 지탱해 왔다. ‘탐욕’이라는 수식어가 따라붙는 자본주의에 길들여진 사회는 여전히 성과와 효율에 사로잡혀 있다. 한 쪽의 부가 고스란히 다른 쪽의 빈곤이 되는 구조가 단단해진 사회에서 위협은 일상 가까이에 있다. 어쩌면 우리는 복잡한 세상에서 그 위협이 얼마나 가까운지 느끼지 못하는 공포에 면역된 상태에 있을지도 모른다. 그 사회가 초래 한 세계의 말단에 두 마을이 있다. 부조리는 소소하고 평범한 일상을 향해 있다. 
나의 고향 마을에도 송전탑이 서 있다. 집에서 불과 250미터. 마당에서 8기가 보인다. 객지에서 학교를 다니던 나는 탑이 세워지던 당시가 기억도 잘 나지 않는다. 부모는 몇 번 데 모에도 나갔다고 했다. 세상에 관심을 갖고 뒤늦게 그때의 근심을 짐작하는 일이란 부끄럽고 버거운 일이었다. 어쩌면 이 마을들을 찾아가는 여정은 그 부끄러움의 끄트머리에 있 을지 모른다. 
내가 산과 강의 마을에서 보려고 한 것은 위태로운 존재의 얼굴이었다. 불안과 고통 속의 표정을 담으면서 부조리를 지목할 수 있다고 믿었던 것 같다. 그러나 세계는 거대하고 부조 리는 견고하며 사회는 단절돼 있고, 우리는 무뎌져 있다는 의심이 든다. 고통의 얼굴만이 아닌, 그로부터 돌아서서 일상 속의 고요한 파문을 느껴보고자 한 것은 그 때문일지 모른다. 
사진이 무엇을 지목하고 그것에 혐의를 물을 수 있을 거라고 기대하지는 않는다. 다만 이러한 고통의 존재를, 또 그 무엇도 빼앗아서는 안 될 생명들을 기억하고자 할 뿐이다. 작고 소리 없는 존재 앞에 쭈그려 앉아 응시하고자 하는 마음뿐이다. 주인을 잃은 집과 고양이와 논과 밭, 그리고 수풀과 말이 없는 나무 앞에서...... 
산으로 둘러싸인. 강과 시내가 아름답게 흐르는 모든 마을에 이 사진들을 바친다. 
2015년 10월 최형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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